그날도 습관적으로 인스타그램을 열어 피드를 확인했다. 헉??? 앱을 열자마자 접한 소식에 한동안 잠잠했던 기립성 저혈압이 도지는 기분이었다. 지금 밥이나 먹고 있을 때가 아니었구나. 걸그룹 멤버와 남자 배우의 열애설로 온 세상이 떠들썩했다. 살면서 이런 소식을 처음 접하는 게 아닌데도 새삼스러웠다. 세상에서 제일 빠른 속도로 여론을 살핀 후 놀란 마음을 추스렀다. 어차피 곧 소속사에서 열애설을 부인하는 입장 발표를 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이라고 해도 어지간하면 아니라고 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현실은 내 예상과 달랐고 공식적인 입장 발표가 난 뒤에는 오만 가지 말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그건 원치 않는 방식으로 사생활을 공개 당한 자의 몫이었다.
언제 찍혔는지도 모를 사진이 하루아침에 공개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내가 친구들과 야무지게 마라샹궈를 먹는 사진이 인터넷에 퍼진다면? 그 사진 한 장으로 온갖 추측과 질타가 마구 쏟아진다면? “일석, SNS에 동물권 관련 책 올리더니 새우 완자 듬뿍 추가해” “사회문제에 목소리 내던 일석은 어디로? 친구들과 수준 낮은 대화 이어져” “혈당 걱정은 모두 거짓말? 식사 이후 탕후루까지” 같은 헤드라인이 밤낮으로 발표된다면? 더군다나 어디로 훌쩍 떠나거나 숨어버릴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 누군가는 지금도 겪고 있을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나 자신이 우스웠다. 내가 언제부터 연예인 사생활 보호에 신경 썼다고? 무슨 이슈 터질 때마다 군침이 싹 도는 도파민 취급했으면서? 발등에 불 떨어지니까 사생활이나 인권 같은 것을 운운하는 꼴이 같잖다. 아무래도 케이팝은 스스로 불러온 재앙이 맞다...
연애 인정에 대한 반응은 걸그룹 멤버를 향한 말이 대부분이었다. 걔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걔의 사랑까지 응원해야 한다, 돈은 팬들이 쓰고 용서는 머글이 한다, 연애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시기다, 연애를 인정한 건 잘못된 선택이다, 팬 기만이다, 그래봤자 걔의 진짜 애인은 그룹 내에 있다 등등 하나부터 열까지 다 널 위한 소리가 이어졌다. 케이팝 경력 20년 차로서 이런 말도 저런 말도 다 어떤 마음에서 비롯된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당사자가 당황스럽고 불안한 만큼 팬들의 마음도 비슷하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하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아이돌을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마음이 서로에게 얼마나 가닿을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뒤숭숭한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기검열이 시작되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나도 머글일 텐데 과연 내가 말할 자격이 있나? 그러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상화와 착취가 만연한 케이팝 산업과 그 이슈에 대해 돈을 쓴 사람에게만 말할 권리가 주어진다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돈을 쓴 팬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싶지도 않다. 이미 그들은 ‘빠순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오해받고 납작하게 평가당하기 때문이다. 아이돌을 향한 팬의 애정 방식은 정말 다양해서 나는 그들이 ‘돈만’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돈과 시간은 세어볼 수 있지만, 그 마음의 크기와 깊이는 누구도 헤아릴 수 없다. 또 그 마음은 많은 이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그저 ‘유사 연애’의 감정만이 전부가 아니다.
결국 결론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입만 뻥긋거리다 말 것이다. 영원히 입장 정리를 하지 못한 채로 번잡한 마음이 돌고 돈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당사자가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알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그의 안전을 걱정할 뿐이다. 소속사의 주가 폭락이나 성적 부진 등 숫자와 연결 지어 당사자에게 떠넘겨질 책임, 기사마다 달라붙을 ‘누군가의 연인’이라는 수식어, 연애를 하든 안 하든 벗어날 수 없는 심각한 수준의 성희롱과 악의적인 비방 등 그에게 불어닥칠 수백만 가지 상황을 생각하면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알고 있다. 덕질하는 게 처음은 아니라, 이런 소식도 생전 처음 접하는 건 아니라 이 괴로움과 쓸쓸함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걸. 지금은 걔의 하루를 걱정하지만, 언젠가는 걔의 생일도 잊어버릴 수 있다는걸. 이런 나의 얄팍한 애정을 알아서인지 나는 아이돌이 꽤 외로운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어떤 마음을 계속 신경 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모든 이슈의 당사자는 아이돌이 처음일 텐데, 당장 내일도 속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 앞에서 웃으며 손을 흔들어야 할 텐데. 진짜 큰일난 건 언제나 내 인생인데도 나는 이런 것들을 걱정하느라 시간을 갉아먹는다. ...케이팝 언제쯤 그만둘 수 있을까? (눈물)
또 습관적으로 인스타그램을 열었다. 당사자가 자필 사과문을 올렸다는 소식이었다. 인스타그램은 신기할 정도로 알고 싶지 않은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준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조금 긴장한 채로 그 내용을 확인했다. 실망시켜서 미안하다고, 밥을 잘 챙겨먹으라는 내용이었다. 저쪽은 법적 대응을 한다던데 너는 자필 사과문을 쓰는구나. 우리 신세가 참 처량하다. 내게 그 글은 사과문이 아니라 편지였다. 그건 소속사에서 짠 스크립트일 수도 있고, 걔가 며칠 밤을 고민하며 고르고 고른 말일 수도 있고, 혹은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이 글은 에스파의 첫 단독 콘서트에서 응원봉을 신나게 흔들며 목이 쉬어라 노래를 불렀던 사람이 쓴 글이다. 수신인에게 닿을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 일로 당신에게 실망하지 않았다고, 너도 밥을 거르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