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케이팝 뉴스레터 <편협한 이달의 케이팝>을 발행하는 일석입니다. 1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편협한 이달의 케이팝’ 1월호를 보내드립니다. 연초에는 좀 잠잠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케이팝 하느라 정말 바쁜 한 달을 보냈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열심히 편협하게 노래를 골랐고요. 이번 호는 분량 조절에 실패했는데, 다음부터는 좀 더 쌈박하게 갈무리해 보겠습니다. 케이팝만 하면 말이 많아지네요. 이 버릇 도대체 언제 고칠 수 있을지... 아무튼, 구구절절한 ‘편협한 이달의 케이팝’ 1월호를 시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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❶ 이달의 케이팝
→ 에스파의 ‘시대유감 (時代遺憾)’
1월 15일 오후 6시 정각, 조금은 경건한 마음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2분 51초가 흐른 뒤 생각했다. ‘1월호부터 뉴스레터 이름값 제대로 하겠구나...’ 편협한 1월의 케이팝은 에스파의 ‘시대유감(時代遺憾)’이다. 1995년에 발매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를 약 30년 만에 에스파가 재해석해 선보인 곡이다. 강렬한 밴드 사운드의 원곡은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 어디로든 질주하고 싶어진다면, 에스파 특유의 ‘쇠맛’이 더해진 리메이크 버전은 어느 광장에서 확성기를 들고 이것저것 규탄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록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편협한 선택의 근본적인 이유는 이 노래의 가사 때문이다.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왜 기다려 왔잖아 모든 삶을 포기하는 소리를” “모두를 뒤집어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네” 직설적이고 ‘참지 않는’ 노랫말이 속시원하면서도 그때도 지금처럼 어지간히 살기 힘들었구나 싶어 씁쓸하기도 하다. 원곡은 발매 당시 한국공연위원회로부터 가사가 반사회적이라는 이유로 심의 불가 판정을 받았고, 이 곡을 만든 서태지는 이에 항의하는 의미로 가사를 삭제한 버전을 앨범에 실었다고. (진심으로 본받고 싶은 기개다.) 다양한 장르와 콘셉트의 케이팝이 연일 발표되는 요즘이지만, 시대정신이나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은 곡은 찾아보기 어렵다. 몰아치는 신보 소식에 허덕이면서도 어떤 갈증이 있었는데, 예고도 없이 찾아온 2024년의 ‘시대유감’이 메마른 목구멍에 냉수를 콸콸 쏟아부었다. 1995년의 가사를 2024년에 공감하는 현실은 유감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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❷ 이달의 과몰입
→ (여자)아이들의 ‘Wife’
‘아이들.. 정말 너야?’ (여자)아이들의 정규 2집 [2]의 발매를 앞두고 선공개한 ‘Wife’에 대한 감상이다. 하나의 세계관 서사가 아닌 매번 새로운 콘셉트를 선보였기에, 똑같은 가발을 쓴 멤버들을 보자마자 ‘케이팝 레이더’가 켜졌다. 화려한 세트장을 배경으로 값비싼 명품을 휘두른 채 등장하는 아이돌 그룹 사이에서 ‘노 세트’, ‘노 명품’이라니, 오히려 좋아. ‘아내’를 뜻하는 영어 제목을 보고 아무래도 이번에 트렁크에 실릴 희생양은 ‘가부장’이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들을수록 가사가 좀 이상했다. 내 뇌가 썩은 건가 싶어 얼른 케이팝 팬 선생님들의 여론을 살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혼자만의 의아함이 아니었고, 이 노래는 빠르게 ‘선정성 논란’에 휩싸였다. 와중에 콘셉트와 노래가 나름 마음에 들었던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이제 누가 형광민트색 가발 써주냐. 이런 거 ‘말아줄’ 그룹은 (여자)아이들밖에 없다고. 고민을 더한 과몰입의 시간이 길어진다.
가족 모임에서 ‘TOMBOY’ 무대 영상을 보며 춤을 따라 추던 동생들이 떠올랐다. 소파에 누워 그 모습을 보며 동생들이 따라 부르는 노래가 달샤벳의 ‘내 다리를 봐 (Be Ambitious)’가 아니라서, AOA의 ‘짧은 치마 (Miniskirt)’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어쩜 괄호까지 완벽하게 별로다.) 동생들이 ‘Wife’를 따라 부르며 춤을 추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괴롭긴 하다. 앨범이 공개되면 모든 찝찝함이 해소될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도대체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앨범 소개에 “But I’m not”이라는 문장이 실린 것과 그동안 (여자)아이들이 보여준 행보를 단서 삼아 획일화된 여성상에 대한 비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지 않을까 짐작할 뿐이었다. 정규 2집의 수록곡 일부를 공개한 영상에서는 이 곡이 휴지통에 버려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앨범의 8번 트랙에 자리 잡고 있다. 만약 ‘Wife’가 빠진 채로 앨범이 발매됐다면, ‘역시 큰 그림이었다’며 감탄했을지도 모르겠다.
반면 타이틀곡 ‘Super Lady’는 명료하고 직관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제목부터 짐작할 수 있듯, 이 세상의 모든 여성들에게 바치는 헌정곡이다. 강한 여자를 ‘독한 여자’로 간주하는 것은 아쉽지만(‘독하다 해 That’s my name’), ‘원더우먼’의 계보를 잇는 ‘우먼 임파워링’ 케이팝인 것은 분명하다. 정규 2집은 멤버들이 모든 트랙에 작사·작곡으로 참여한 앨범으로, 걸그룹 세계에서 보기 드문 ‘자체 프로듀싱’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멤버들의 컨디션 난조 등 본격적인 활동 전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이들의 노력과 재능이 크고 작은 이슈들에 등한시되지 않기를 바란다. 더불어 이들이 어느 날 트로트로 컴백한대도 기꺼이 응원할 사람으로서, (여자)아이들이 나의 ‘Super Lady’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그러므로 조금은 복잡한 심경의 ‘이달의 과몰입’ 대표 영상은 ‘Wife’가 아닌 ‘Super Lady’로 대체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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❸ 이달의 추천곡
→ 지오디의 ‘It's Alright (feat. G-soul)’
지난 1월 13일은 지오디의 데뷔 25주년이었다. 25주년이라니, ‘팬지오디’ 선생님들이 진심으로 부러워진다. 이달의 추천곡은 지금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과 함께 25주년을 맞이하고 싶은 케이팝 팬으로서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골랐다.
인류애가 박살 나는 순간이면 오랜 기간 아카이빙해온 ‘인류애 복구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한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로 시작하는 이 플레이리스트에는 ‘지오디 구간’이 있다. ‘촛불하나’, ‘두개의 문 (Feat. JYP)’, ‘It’s Alright (Feat. G-Soul)’등이 연속으로 재생된다.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 인류애가 회복되지는 않지만(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속절없이 쌓이는 구린 잡념을 떨치는 데에는 꽤 도움이 된다. 미미한 효과도 효과니까. 각박한 세상살이에 마음이 딱딱하게 굳을 때면, 이 노래를 꺼내 듣는다. 웃는 날보다 한숨 쉬는 날이 많은 냉소적인 인간에게도 희망의 메시지는 언제나 필요한 법이다.
‘이달의 추천곡’이 수록된 지오디 7집 [하늘속으로] 앨범 커버. 이미지를 누르면 노래를 들을 수 있는 페이지로 넘어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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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잘한 일 중 하나는 3년 5개월 만에 열린 태연의 단독 콘서트 ‘The ODD Of LOVE’에 간 것이고, 후회되는 일 중 하나는 그 콘서트에 ‘올콘’하지 않은 것이다. 오프닝 무대에서 ‘INVU’의 첫 소절을 부르던 태연을 떠올리면 지금도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팬들의 오랜 기다림에 응답하듯, 태연은 오프닝 무대에서 정규 3집 수록곡을 연이어 선보였다. ‘Siren’도 그중 하나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사이렌’을 모티브로 한 신비로운 분위기의 곡이다. 매일 듣기만 하던 노래를 ‘보는’ 순간의 짜릿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물속을 유영하는 듯한 안무와 차가우면서도 아련한 태연의 목소리가 어우러진 무대를 보며, 사이렌의 노랫소리에 현혹되었다는 선원들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안 넘어가고 어떻게 배기나요? 저는 그런 방법을 모릅니다.
태연은 어떤 콘셉트도 찰떡 같이 소화하는 ‘무대 장인’이기도 하지만, 독보적인 보컬리스트이기도 하다. 그의 공식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된 레코딩 비하인드 영상에서 그 진가를 엿볼 수 있다. ‘헤메코’ 없는 모습으로 좁은 녹음실 안에서 한마디 한마디를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 어떤 면에서는 무대를 볼 때보다 많은 감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긴 시간을 몇 분으로 압축한 영상만으로 그 지난한 과정을 모두 알기는 어렵겠지만, 완벽한 모습을 선보이기까지 얼마나 섬세한 노력을 기울였는지 가늠해 보게 된다.
지난 11월에 발매된 다섯 번째 미니앨범 [To. X]의 모든 수록곡의 레코딩 비하인드 영상이 태연 공식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됐다. 그만큼 자신 있으시다는 거지. 진정한 ‘보컬 차력쇼’인 2번 트랙 ‘Melt Away’ 레코딩 비하인드 영상은 꼭 한번 보기를 추천한다. 참고로 나는 영상을 본 뒤 이 노래를 라이브로 들을 수 있다면 그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이겨낼 것이라 다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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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곡은 씨엘의 정규 1집 [ALPHA]에 수록된 ‘Siren’이다. 이 앨범은 자고로 ‘일석이 선정한 한국 100대 명반’에서 빠지지 않을 음반 중 하나다. 씨엘이 전곡 작사·작곡에 참여해서인지 개인적으로 모든 곡이 타이틀곡처럼 느껴질만큼 존재감이 크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는 오랜만에 듣는 씨엘의 보컬이 반가웠고, 영어 가사를 해석하며 들었을 때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Just wanna see you face to face (너를 직접 마주 보고 싶을 뿐이야)” “Give me time and place (내게 시간과 공간이 필요해)” “You know that I’m keep trying (내가 계속 노력하는 거 알잖아)” 가사를 되새길수록 그를 기다렸던 팬들에게 전하는 절절한 고백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그리워해요’를 녹음하며 예감한 마지막, 기사로 접한 팀의 해체 소식 등 예상치 못한 이별을 맞이한 그때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그런 헤어짐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투애니원이 약 7년 만에 완전체로 ‘코첼라Coachella Valley Music and Arts Festival’ 무대에 올랐을 때는 꺼이꺼이 울었다. 벅차고 기뻐서, 우리가 겪은 과거의 시간이 속상해서 울었다. 당장이라도 데스노트에 어떤 이름을 빼곡히 채우고 싶었지만, 춤추고 노래하는 언니들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참기로 했다. 세모나게 뜬 눈을 동그랗게 떠도 눈물은 계속 흘렀다. 그래도 영원한 이별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씨엘은 공연 이후 인스타그램에 “너무 늦어지기 전에 나의 힘으로, 우리의 힘으로 모이고 싶었”다고, “다음에는 이 무대 한 시간을 다 채우는 날을 위해 계속 달리겠”다고 팬들에게 마음을 전했다. 죽기 전에 투애니원 콘서트 갈 수 있을까 싶었는데, 나보다 언니들이 더 하고 싶을 것 같아서 조금 마음이 놓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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❺ 케이팝은 아닙니다만
→ 김종서의 ‘Plastic Syndrome’
언제부터인가 1월 1일에 처음 듣는 곡이 한 해를 결정한다는 ‘사이버 미신’이 떠돌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연말이 되면 착실히 플레이리스트를 살폈다. 재작년에는 투애니원의 ‘내가 제일 잘나가’를, 작년에는 엔시티 드림의 ‘Hello Future’를 들었다. 말할 것도 없이 제일 잘나가는 한 해를 보내지도, 다가올 미래에 기대를 품는 한 해를 보내지도 않았다. ‘아침부터 바닐라 어쩌고 프라푸치노를 마셔도 혈당이 오르지 않게 해주세요’ 같은 터무니 없는 것들을 바라서일까. 아마 세계평화나 성평등을 소원했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다. 연말이면 들뜬 분위기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기 마련인데, 작년 연말은 이상하리만치 덤덤했다. 특별히 바라는 것 없이 그저 세상살이가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노래를 틀었다. “세상 모든 걸 다 가지려 하지 마 꿈은 꿈대로 남겨둬”라는 첫 소절부터 완전히 내 노래였다. 1월은 대충 이 노래처럼 보낸 것 같다. 다가올 2월도 별 탈 없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좋은 일이 많기보다 나쁜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왕이면 혈당도 오르지 않았으면 좋겠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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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협한 이달의 케이팝⚡️
매월 15일에는 <케이팝은 핑계고>를
마지막 날에는 <편협한 이달의 케이팝>을 보냅니다.
(돌아와 돌아와 돌아와 다시 돌아와)
📮nameisonest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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