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오되고 밀려나고 실패한 이들에게
#9 케이팝은 핑계고
힘을 낼 시간
낙오되고 밀려나고 실패한 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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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편협한 이달의 케이팝>을 발행하는 일석입니다. 오늘 레터는 얼마 전 막을 내린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본 영화 <힘을 낼 시간> 리뷰입니다. 영화를 극장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레터를 준비했어요. 이 영화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 영화 프로젝트로, 아이돌의 인권 문제를 다루는 영화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이돌들이 제가 평생을 일해도 만질 수 없는 돈을 손목에 차고 다닌다거나 몇십 억대의 부동산을 현금으로 구매했다는 기사를 볼 때면 ‘아이돌의 인권’에 대해서는 다소 냉담해지기도 하는데요(2024년 최저임금은 시간당 9,860원.. 혁명 필요..). 그래서 화려한 모습 뒤에 가려진 또 다른 장면이 있다는 것을 종종 잊는 것 같습니다. 안간힘을 써도 영원히 어떤 세계로 진입할 수 없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이 영화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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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레터에는 발행인이 패널로 참여하는 <케이팝 하는 여자들> 토크 소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레터 하단을 확인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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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앤 리즈’의 리더 수민(최성은)과 메인 댄서 사랑(하서윤), ‘파이브 갓 차일드’의 서브 보컬 태희(현우석). 고등학교 동창인 세 사람은 애매하게 활동하다 애매하게 해체된 아이돌 그룹 출신이다. 그럴듯해 보이는 수식어가 사라진 세 사람의 현주소는 이렇다. 10년이 넘도록 하루에도 몇 번씩 체중을 재는 환경에 놓였던 수민은 음식을 입에 넣는 족족 그대로 토해내고, 정신과 약 없이 잠에 들지 못하는 사랑은 하루 종일 이어폰을 꽂고 옆 사람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음악을 들으며 세상과 단절되기를 택한다. 태희는 군 복무 중에 망해버린 팀의 해체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아직 2년이라는 계약 기간이 남아 소속사에 발이 묶인 상태다. 언젠가 ‘뜰지도’ 모른다는 믿음으로 밤낮없이 일했지만, 이들에게 남은 것은 불어난 빚과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이다. ‘전직 아이돌’인 세 사람은 그 시절이 남긴 후유증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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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나마 남들이 해본 거 다 해보자는 마음으로 세 사람은 이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이들의 여행은 첫날부터 순조롭게 흘러가지 않는다. 버스에 짐을 두고 내리고, 예상치 못한 해프닝으로 여행 경비를 몽땅 날려버린다. 순탄치 않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지만 세 사람은 이 정도 불운은 익숙하다는 듯이 없으면 없는 대로 여행을 이어 나간다. 난방 장치가 고장난 캠핑카로 숙소를 옮기고,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귤을 따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귤 농장 사장을 ‘실장님’이라 부르며, 마치 음악 방송을 마친 아이돌이 담당 PD에게 하듯이 연신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돈값’을 해야 한다는 강박, 그렇지 않으면 낙오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몸에 밴 이들은 남들보다 두 배가 넘는 양의 귤을 따고 사장으로부터 그만 따도 된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은 뒤에야 일당을 받는다. 세 사람이 받은 건 인생 첫 ‘정산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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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차트 순위에 오른 적 없는, 흥행에 실패한 아이돌에게도 팬은 있다. 세 사람은 우연한 계기로 자신들을 알아본 팬 소윤(강채윤)을 만난다. 이것저것 다 해보는 그런 여행을 꿈꿨지만, 막상 시간이 주어져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텅 빈 운동장 트랙을 뛰며 발성 연습이나 하던 이들에게 짧게나마 여행의 장면을 선물해 주는 것은 소윤이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던 이들은 진심을 내보이는 소윤의 태도에 조금씩 마음을 열고 소윤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러브 앤 리즈는 ‘시크릿 러버’라는 곡으로 나름 인지도를 쌓았지만, 그 노래를 흥얼거리는 소윤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표정은 어둡기만 하다. 달라진 공기의 흐름을 파악한 소윤은 노래를 멈추고, 수민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사실 그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잘된 건 좋은데 그 뒤로 긴 바지를 안 입혀주더라고. 바지가 점점 짧아져. 그런 옷이 불편한 게 진짜 많거든. 생리도 못 하고. 일 년 내내 피임약 먹는 거지.” 수민에게 짙게 드리운 그늘의 정체는 죄책감이다. 선정성이 유명세가 되는 가혹한 상황에서도 조금만 더 해보자고 멤버들을 설득했던 지난날이 후회스럽다. 눈에 보이지만 손에 잡히지 않던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과거의 나를 자꾸만 탓하게 된다. 관두는 것은 수민의 선택지에 없었다. “다들 힘들어했는데 내가 설득했어. 여기까지 왔는데 끝까지 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어린 시절 다 바쳤는데. 근데 우린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걸까.”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썼던 것이 결국엔 나를, 우리를 더 불행하게 만든 것 같아 괴롭기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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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화려한 조명 뒤에 가려진 아이돌 산업의 문제를 다룬다. 불공정한 계약과 금전 문제, 학대에 가까운 과도한 스케줄, ‘마른 몸’에 대한 요구와 강박 등 이러한 문제는 지금도 누군가가 겪고 있을 현실이다. 영화는 착취의 현장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지만, 세 사람의 현재를 통해 문제를 수면 위로 드러낸다. 그 너머의 고충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영화를 보기 몇 주 전에는 어느 걸그룹 멤버가 무대 위에서 실신했다는 기사를 접했고, 며칠 전에는 평균 나이 18세의 어느 걸그룹이 회사의 부조리에 목소리를 내고 팀을 지키기 위해 라이브 방송을 켜기도 했다. 그들은 비교적 좋은 환경에 놓인 것처럼 보이는 ‘대형 소속사’의 그룹이었지만, 라이브 방송을 하기로 마음 먹기까지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일들을 듣고 있지니 그저 암담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많은 이름과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이들의 ‘애매함’은 어느 정도일까? 히트곡 하나 없이 활동하다 뿔뿔이 흩어진 그 그룹일까? 아니면 노출로 잠깐 이슈가 됐던 그 그룹일까? 어쩌면 내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그룹일 수도 있다. 안간힘을 써도 영원히 어떤 세계로 진입할 수 없는 존재들이 있다. 밀려나고 낙오되고 실패한 이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니까 이건 애도의 영화다. 언저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것을 해나가는 사람들, 애썼지만 테두리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 허허벌판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 나가야 하는 사람들, 끝끝내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사람들, 정해진 길을 벗어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애도의 영화다. 그리고 나는 이제는 더 이상 안부를 물을 수 없게 된 이들을 생각했다. 영화의 끝에 수민은 이 여행에 결국 함께하지 못한 멤버가 마지막으로 남긴 문장을 읊조린다. 내가 여기 있다고, 나라는 사람이 여기 있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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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힘을 낼 시간> 트레일러 ©전주국제영화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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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팝 하는 여자들> 토크가 열립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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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 하는 여자들>은 케이팝 소비자의 대부분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목소리가 케이팝 산업 및 문화에 개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문제의식을 갖고 여성의 발화와 이를 통한 영향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시작한 모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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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1일, 28일 토요일에 <케이팝 하는 여자들> 토크가 열립니다. 이번 행사에서는 여섯 개의 키워드(노동·퀴어·스트레스·사랑·페미니즘·지속가능한 덕질)를 통해 케이팝 산업과 문화에 대해 다양한 담론을 나누는 자리인데요. 저는 ‘울면서 케이팝 하는 페미니스트’로서 ‘페미니즘’ 세션에 패널로 참여해 ‘페미니스트로서 케이팝 하는 즐거움과 괴로움’에 대해 이야기할 예정입니다(한 문장에 ‘페미’가 세 번이나 나오다. 나는야 대박 페미..). 행사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토크 참여하기] 버튼을 눌러 확인하실 수 있으며, 세션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케이팝 하는 여자들> 인스타그램에도 업로드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케이팝 위에서 칼춤 추는 심정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부디 저와 함께 고민하고 이야기 나눠주세요..! 제발!)
Week 1. 2024.09.21(토) 오후 1시-4시
📍노동: 서해인(대중문화 뉴스레터 ‘콘텐츠로그’ 발행인) & 박다해(한겨레신문 기자)
📍퀴어: 연혜원(『퀴어돌로지』 저자) & 주연(『누가 나만큼 여자를 사랑하겠어』 저자) 📍스트레스: 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칼럼니스트)
Week 2. 2024.09.28(토) 오후 1시-4시
📍사랑: 아밀(『너라는 이름의 숲』 저자) & 이희주(『환상통』, 『성소년』 저자) 📍페미니즘: 일석(케이팝 뉴스레터 ‘편협한 이달의 케이팝’ 발행인) 📍#지속가능한_덕질 #건강한_케이팝: 캐럿(케이팝 뉴스레터 ‘stew!’ 발행인)
*본 행사는 온라인(ZOOM), 오프라인(홍대 플랫폼P)으로 동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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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협한 이달의 케이팝⚡️
매달 15일에는 ‘케이팝은 핑계고’를
마지막 날에는 ‘편협한 이달의 케이팝’을 보냅니다.
📮nameisonestone@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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