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나온 여자들 대담
정치 너머, 빛 너머, 광장 너머 돌봄과 사랑의 세계로
엔시티 퀴어 깃발을 든 ‘우나’와 오빛봉을 든 ‘니제’와의 대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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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편협한 이달의 케이팝>을 발행하는 일석입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투쟁이 길어지는 가운데 다들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사는 게 투쟁이 아니었던 적이 없지만, 여러모로 마음을 다잡기 어려운 나날입니다. 산불로 인한 더 이상의 피해가 없길 바라며, 마음을 보태고 싶으신 분들은 산불피해긴급모금에 함께해 주세요.
오늘은 지난 호에서 예고한 대로, ‘엔시티 퀴어’로 활동했던 우나 님과 이달의 소녀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나간 ‘오빛’ 니제 님의 대담을 담았습니다. 연구자이자 활동가, 그리고 팬 정체성을 지닌 두 분과 함께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했던 경험과 지금의 응원봉 광장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수많은 응원봉의 등장을 ‘2030 여성’의 일로 묶는 것이 석연치 않았거나, ‘팬덤’이라는 거대한 단어 속에 뭉뚱그려지는 구체적인 이야기가 궁금했던 분들에게 오늘의 이야기가 닿기를 바랍니다.
다음 호에는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나온 여자들’의 마지막 이야기, 응원봉 걸스의 에필로그가 발행될 예정입니다. 그때는 부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기를 소원해 봅니다. 그럼 오늘의 이야기도 즐겁게 읽어주시고, 여러분의 의견도 많이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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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나 @una_now_won엔시티를 덕질하다 퀴어 커뮤니티를 만나고 책까지 썼다. 지금은 특정한 그룹을 덕질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르테미스ARTMS와 엔제이지NJZ, 트리플에스tripleS, 아이브IVE는 꼭 챙겨 듣는다. 연혜원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글을 쓰고 있다. 저서 <퀴어돌로지>, <가장자리를 위한 복수 노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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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제 @neezeh‘광야 쇠맛’과 ‘정병기 코어’의 노예지만 최애는 아솩(이브). 어쩌다 덕후가 한 처먹게 되는지, 한 처먹는 덕질은 어떻게 지속되는지 연구하다가 한만 더 처먹게 되었다. 국민의힘 해체하고 이달의 소녀 재결합하라. 안희제라는 이름으로 주로 연구와 비평을 하며 지낸다. 저서 <망설이는 사랑>, <증명과 변명> 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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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봉 걸스
<케이팝 하는 여자들> 행사에서 만난 구구, 일석, 퐁퐁 세 친구가 만든 프로젝트 팀. 거리에서 만난 ‘팬걸’들의 이야기를 수집 중이다. 언제나 다양한 팬들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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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봉 걸스 반갑습니다.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니제 안녕하세요. <망설이는 사랑>을 쓴 안희제입니다. 10년 만에 대학을 벗어나서 굉장히 기쁜 상태고요. 여전히 오빛으로 한을 먹고 있습니다(웃음).
우나 퀴어예술매거진 <them>을 만들고, 단행본 <퀴어돌로지>를 함께 쓴 연혜원입니다. 투명가방끈 활동가로도 일하고 있어요. 반갑습니다.
#나의 키워드
응원봉 걸스
앞서 연재된 인터뷰에서 인터뷰이분들이 자신에게 중요한 키워드를 소개해 주셨어요. 두 분에게 중요한 키워드 세 가지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니제 오빛, 퀴어, 계급입니다. 제가 이달의 소녀 팬이기 때문에 오빛이라는 키워드가 제일 중요하고요(웃음). 이달의 소녀가 상황이 좀 복잡해서 현재 네 개의 팬덤*이 있어요. 아르테미스 팬덤명은 ‘우리’, 루셈블은 ‘크루’, 츄는 ‘꼬띠’, 이브는 ‘엥두’예요. 최애인 이브의 응원봉을 사긴 했는데, 제가 오로지 이달의 소녀 팬을 지칭하는 ‘오빛’이라는 단어에만 반응하더라고요.
두 번째는 퀴어인데, 덕질을 하면 할수록 퀴어로서 다양한 욕망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주로 걸그룹을 보는데 ‘이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욕망과 ‘저렇게 되고 싶다’는 욕망이 공존하거든요. 아이돌 덕질을 하기 전에는 해본 적 없는 탐색이에요. 덕질하면서 새로운 욕망을 발견하는 경험을 하고 있어요.
마지막 키워드인 계급은 여러 차원의 계급을 뜻하는데요. 일단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팬사인회도 못 가고 앨범도 많이 못 사주고 있거든요. 사실 저희는 그렇게 많이 안 사도 팬사인회에 갈 수 있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을 때 현실 속 저의 계급을 마주하게 되죠(웃음). 또 다른 차원의 계급은 그룹 간의 계급인데요. 첫 덕질을 에스파로 시작했는데, 대형 기획사 소속 아이돌을 덕질하다가 이달의 소녀를 보니까 회사 규모의 차이부터 여러모로 상황이 열악한 게 느껴지더라고요. 거기다 저와 아이돌 사이의 거리감에서 비롯한 계급 문제도 있고요. 이 세 가지 키워드가 덕질하면서 제 마음을 자극하는 지점인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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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소녀 멤버들은 데뷔 당시 소속사였던 블록베리크리에이티브와의 전속계약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에서 승소해 각자 다른 기획사로 이적해 활동 중이다. 희진, 하슬, 김립, 진솔, 최리는 아르테미스로, 현진, 여진, 비비, 고원, 혜주(올리비아 혜)는 루셈블로, 츄와 이브는 솔로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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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나 저는 퀴어, 트위터, 자본주의를 꼽고 싶은데요. 일단 제가 퀴어 정체성이 없었더라면, 애초에 엔시티를 덕질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한때 케이팝을 좋아하는 퀴어 팬들을 만나려면 엔시티를 덕질해야 한다는 게 정설이었거든요. 제가 텐이라는 멤버로 입덕했는데, 퀴어 친구들이 꾸준히 텐을 영업했었어요. 2017년에 텐의 솔로곡 ‘夢中夢 (몽중몽; Dream In A Dream)’이 나오고, 2018년에는 태용과 함께한 ‘Baby Don’t Stop’이 나왔는데, 이 두 곡이 퀴어들 사이에서 반응이 뜨거웠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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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T U ‘Baby Don't Stop’ M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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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입덕하고 팬픽을 읽으면서 엔시티에 더욱 깊이 빠졌고, 이 모든 과정이 트위터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두 번째 키워드로 트위터를 꼽았습니다. 엔시티에 입덕하기 전에 오랜만에 덕질을 해볼까 해서 엑소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거든요. 근데 당시 엑소 팬덤 분위기가 보수적이었어요. 트위터에서도 엑소 이야기 외에 사담을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였고요. 한 번은 어떤 멤버가 여행을 갔다는 트윗을 보고 제가 ‘저도 여기 가봤는데’라고 남겼더니 ‘왜 엑소 말고 다른 얘기하세요?’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어요(웃음). 분위기를 잘 몰랐던 거죠. 팬덤 내에서 팔로워가 많은 계정주들이 팬덤 분위기를 흐린다고 판단하는 계정을 리스트업해서 돌린 적도 있어요. 그럼 팬들은 그 리스트를 보고 해당 계정을 차단하는 거죠. 저도 이유 없이 차단 당해본 적이 있는데 차단당하는 이유를 모르니까 좀 답답하더라고요.
당시 그런 보수적인 분위기에 답답함이나 불편함을 느낀 팬들이 엔시티로 조금씩 넘어왔고, 서로에게 엔시티를 영업하면서 일종의 마을 같은 것을 이루기 시작한 것 같아요. 물론 그들이 엔시티 팬덤의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팬들이 엑소 팬덤으로부터 넘어왔던 것은 사실이에요. 그중에 퀴어 팬들도 많았고요. 엔시티가 초반에 명작 팬픽이 많은 걸로 유명했는데, 엑소 팬덤에서 유명한 팬픽을 썼던 사람들과 팬덤 문화의 기반을 다진 사람들이 많이 넘어왔었거든요. ‘엑소 팬덤에서 못 했던 걸 여기서 하자’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시도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고요. 데뷔 초에는 엔시티 팬덤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었어요. 그게 엔시티 퀴어*의 배경이었던 셈이죠.
마지막 키워드인 자본주의는 노동과 연결되는데요. 개인적으로 이 두 가지를 빼고 케이팝을 얘기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최근에 스타쉽엔터테인먼트에서 데뷔한 키키의 ‘I DO ME’를 즐겨 듣는데,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나로서 존재하겠다는 포부가 담긴 곡이거든요. 근데 들으면서 자꾸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온전한 나로 살기 위해서는 안전망이 필요한데? 당당하게 살겠다는 포부만으로 다 되는 게 아닌데?(웃음) 저는 기획사의 규모와 관계없이 아이돌에게 안전망이라는 게 없다고 생각해요. 아이돌을 저와 같은 노동자로 바라보게 되면서 예전처럼 그저 감탄하는 식으로 덕질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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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서울퀴어문화축제 리플렛 후원 모금과 전국 퀴어문화축제에 깃발을 들고 참여하기 위해 처음 결성되었다. 팬덤 내 퀴어 팬들을 인터뷰하고, 청소년 퀴어 팬들을 위한 파티를 여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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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제 우나 님 말씀에 공감하는 게, 저는 글을 쓰는 프리랜서 노동자로서 정체성이 강해질수록 아이돌에 대한 마음이 복잡해지더라고요. 많은 작가들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작가이자 인플루언서이기를 요구받아요. 북토크도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하면 팬미팅처럼 흘러가는 경우가 많고, 독자에게 디엠이 오면 늦은 시간에도 확인하거나 답장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일들 모두 ‘정동노동’이거든요. 내키지 않는다고 해서 하지 않을 수 없고요. 아이돌과 비슷한 처지처럼 느껴질 때면 멤버들은 얼마나 힘들까 싶죠.
앞서 말한 계급과 연결되는 이야기이기도 한데, 에스파가 ‘Whiplash’로 활동했을 때 지젤이 소위 ‘지젤력’*으로 주목받았잖아요. 그때 친구랑 “아무래도 ‘지젤력’은 계급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지젤이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집안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거든요. 그런 걸 보면 ‘나도 저렇게 되고 싶은데 영영 될 수 없겠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거리감이 느껴지는 한편, 그들이 처한 불합리한 노동 환경을 모르는 게 아니니까 마음이 복잡해지죠. 저와 겹치는 지점과 멀어지는 지점을 동시에 갖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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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 멤버인 ‘지젤’과 ‘힘 력(力)’을 더한 말로, 지젤이 ‘Whiplash’ 무대에서 보여준 관능적이고 자신감 있는 모습이 팬덤 안팎으로 주목을 끌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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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나 그래서 저는 좋아하는 아이돌이 명품 브랜드의 앰버서더로 선정되거나 ‘인간 땡땡(브랜드명)’으로 불리는 걸 보면 심란해져요. 명품 브랜드의 모델로 선정되는 것이 어떤 팬들에게는 자긍심이잖아요. ‘명품’이라는 이미지만 취하고, 명품 산업의 착취를 지우는 게 저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예요. 비슷하지만 또 다른 맥락에서, 록이나 힙합 등 노동 계급으로부터 시작된 하위문화에서 계급은 지우고, 강인하고 저항적인 이미지만 가져오는 것도 불편해요. 올해 미국 대중음악 시상식인 ‘그래미 어워즈’에서 싱어송라이터 채플 론이 수상 소감을 전하면서, 레이블이 소속 아티스트의 임금과 건강 보험 혜택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 것이 무척 인상 깊었거든요. 저는 노동 계급이 가진 멋짐이 있다고 생각해요. 록스타 같은 면모라고 할까요? 어떤 파워풀한 에너지가 있잖아요. 그런데 나와 비슷한 계급에서 만들어진 문화를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돈을 주고 사야 한다는 데서 오는 소외감이 있어요. 그래서 아티스트를 노동자 대 노동자로 만나고 싶고요.
#광장과 응원봉
우나 인스타그램에서 니제 님이 집회에서 응원봉을 들고 찍은 사진을 올리신 걸 봤거든요. 저는 응원봉이 없는 상태로 엔시티를 완덕한 사람이라 응원봉을 들고 나간 사람의 경험이 궁금했어요.
니제 저는 이달의 소녀, 루셈블, 이브, 에스파 응원봉을 가지고 있는데, 이달의 소녀 응원봉인 오빛봉만 들고 다녔어요. 이달의 소녀가 소속사와의 계약 분쟁을 잘 이겨내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어서 오빛봉이 다른 응원봉보다 애틋한 것 같아요. 광장에서 다른 오빛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광장에 처음 나갔던 날에는 아이돌에게 정치색 입히지 말라고 할까 봐 눈치 보여서 응원봉을 못 챙겼는데, 막상 가보니 온 사방이 응원봉인 거예요. 오빛봉을 응원봉이 아니라 ‘오빛’ 혹은 ‘이달의 소녀’라는 개별적인 상징으로 여겼는데, 그 광경을 보면서 누군가의 팬이라는 것만으로 다른 사람들이랑 연결되는 감각을 느꼈어요. 응원봉이 있으면 이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는 감각이 더 커질 것 같아서 그다음부터 응원봉을 챙겨 갔고요.
한편으로 멤버들이 응원봉을 들고 나간 걸 이해해 줄 거라는 마음도 있었어요. 계약 문제를 겪으면서 멤버들도 이 세계의 불합리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렇게 일을 많이 하는데 정산을 하나도 못 받는 경험을 했으면 응원봉을 들고 나간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 싶었죠. 동시에 ‘우리가 여기에 있다’라는 걸 알아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고요. 응원봉을 들고 나간 게 멤버들한테 힘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힘이 되기를 바랐고요. 광장에서는 ‘여전히 팬들의 사랑을 받는 이달의 소녀는 해체했는데, 왜 국민의힘은 해체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제일 많이 했어요(웃음).
제가 광장에서 응원봉을 들고 찍은 사진을 이브 네이버 블로그 안부글에 비밀 글로 올린 적이 있는데요. 이브가 실제로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촛불 이미지를 올리거나 팬 소통 플랫폼을 통해 탄핵 집회에 나가는 팬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이브도 동의하고 좋아할 거라는 마음으로 올렸던 것 같아요. 혜주는 집회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고, 팬들을 만나면 커피 사준다고 하기도 했어요(웃음).
우나 이번에 혜주의 행보가 정말 인상 깊었어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불안정한 노동자고, 같은 세대로서 동시대를 살고 있는 시민이라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거든요. 이번에 이달의 소녀 멤버들을 비롯해 몇몇 아티스트에게서 광장에서 팬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 욕망을 봤던 것 같아요. 그런데 대부분의 아이돌이 소속사로부터 검열당하고 있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잖아요. 회사 입장에서는 돈을 버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래서 이달의 소녀 멤버들이 목소리를 내준 게 더욱 반가웠어요. 금융 자본주의와 파시즘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 금융 엘리트들이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쥐고 있잖아요. 하이브가 대표적이고요. 돈을 버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기에 산업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봐요.
니제 수많은 사회 문제가 덕질과 연결되어 있잖아요. 이달의 소녀가 계약 분쟁으로 그룹이 공중분해가 될 상황이었을 때, 불공정 계약 문제를 의제화하고자 오픈 채팅방을 만든 적이 있어요. 많은 사람이 모인 건 아니었지만, 뭐라도 같이 해보고 싶었어요. 팬으로서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동료 시민으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정말 말도 안 되는 계약이었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동료 시민으로서의 자아와 팬으로서의 자아가 만난 것 같아요.
#팬덤 소속감
응원봉 걸스 니제 님은 현재 오빛으로, 우나 님은 과거 엔시티 퀴어로 활발히 활동하셨는데요. 팬덤 내에서 소속감을 느꼈던 경험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나 엔시티 퀴어로 활동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시에 퀴어로서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었어요. 서로를 붙잡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아서 더 뭉쳐있었던 것 같아요. 조각나고 분열된 마음을 어떻게든 이어보려고 엔시티 퀴어를 만든 거죠. 서로를 먹이고, 잘 곳을 내어주면서 힘든 시기를 함께 건너왔고요. 어쩌면 엔시티를 향한 사랑보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더 컸을지도 몰라요.
엔시티 퀴어 팬들이 다른 팬들과 달랐던 점은 약간의 냉소가 있었다는 점이에요. 아티스트와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고 할까요. 멤버들 중에 퀴어가 있을 수도 있다고 과몰입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다 허상일 수도 있다고 단념하기도 했죠. 멤버들이 커밍아웃하기 전까지는 답을 알 수 없지만요. 저희의 가장 큰 바람은 엔시티와 에스엠이 우리의 존재를 인지하는 거였어요. 팬덤 내에 퀴어가 있다, 퀴어 혐오적인 것을 하지 마라, 엔시티에 퀴어가 있다면 그들의 인권도 존중해 달라,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거든요. 어떻게 하면 우리의 존재를 알릴 수 있을지 매일 그런 얘기만 했던 것 같아요. 팬인데 사랑을 전하는 것보다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게 먼저였어요(웃음). 엔시티는 일종의 매개고, 엔시티 퀴어는 지하 조직처럼 되어버린 거죠. 근데 돈이 없어서 팬사인회에 갈 수가 없으니까 우리가 이런 걸 하고 있다고 말할 방법이 없더라고요(웃음).
응원봉 걸스 당시 팬덤 내에 퀴어에 관한 언급을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사이버 불링도 많았을 것 같아요.
우나 정말 많았죠. 처음에는 아무도 엔시티 퀴어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때는 팬덤 내에 있는 퀴어 팬덤을 볼 정도로 엔시티가 유명하지 않았거든요(웃음). 다들 무관심하다가 생각보다 팬덤 내에 퀴어들이 많다는 게 알려지고, 퀴어문화축제에 광고를 싣기 위해 진행했던 모금이 예상보다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엔시티 퀴어 깃발을 들고 나가면서 점점 가시화되니까 사이버 불링이 시작된 거예요. 당시에 ‘엔시티’라는 이름 뒤에 뭘 붙여서 활동하는 게 상표권 문제라면서, 저작권 개념이 없냐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는데요. 저작권 문제가 있다면 에스엠에서 조치를 취해야지, 팬덤이 뭘 할 수 있겠어요? 저희는 오히려 에스엠에서 저작권 문제로 연락이 오기를 바랐어요. 그럼 우리의 존재를 안다는 거니까요(웃음).
당시에 엔시티 퀴어로 맺어진 관계들이 무척 끈끈하고도 취약했어요. 퀴어라는 이유로 다른 팬들에게 사이버 불링을 당하고, 원가족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않았거든요. 깊게 관여하고 의존하면서 말 그대로 서로를 먹여 살리는 돌봄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당연히 내부에서 갈등도 있었고,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어요. 저에게 너무 중요한 관계였기 때문에 더 큰 상처를 받기도 했고요. 엔시티 퀴어 깃발이 광장에 나오지 않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에요. 여러 이유로 공동체가 와해되면서 깃발을 광장에 들고 나갈 수 없게 된 거죠. 그래서 한동안은 엔시티 퀴어에 대한 이야기를 대외적으로 하지 않았어요. 혼자 했던 활동이 아니고, 함께 했던 활동이었으니까요. 내가 이 경험을 말해도 되나 망설여졌죠. 하지만 지금은 그럼에도 나의 경험이기 때문에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에요. 시간이 많이 지난 만큼 제 안에서도 많은 것이 정리되기도 했고요. 퀴어 공동체의 끈끈함과 취약성을 동시에 경험한 시간이에요.
응원봉 걸스 기억에 남는 엔시티 퀴어 활동이 있나요?
우나 청소년 퀴어 팬들을 위한 파티를 열었던 적이 있어요. 퀴어 팬 중에 청소년들이 많다는 걸 알고, 퀴어 청소년을 위한 파티를 열자는 얘기가 나온 거죠. 청소년이 카페를 대관하는 절차가 꽤 복잡해서 성인 팬들이 카페를 대관하고, 청소년 퀴어 팬들은 준비팀으로 함께 파티를 운영했어요. 퀴즈도 풀고, 최애 자랑도 하고, 굿즈도 주고받고, 음식도 나눠 먹었죠. 청소년과 성인이 격리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서로 협업해 보는 경험을 하기가 어려운데 당시에 많은 청소년과 교류했었어요. 팬덤 바깥에서는 할 수 없었던 경험이고, 그때의 자산으로 지금까지도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아요.
니제 저는 팬덤 내 소속감을 생각하면 앞서 말한 오픈 채팅방이 떠올라요. 의제화를 위해 만들었던 거니까 지금은 채팅방을 없애도 되는데, 이상하게 삭제를 못 하겠더라고요. 그 방에 이달의 소녀 관련 소식이 있을 때마다 항상 공유해 주시는 분이 있거든요. 애초에 사람도 별로 없고, 있는 사람들도 반응을 잘 안 하는데도요. 활발하게 소통하지는 않지만 미세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껴서 이 방을 없애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
낯을 가려서 오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은 아닌데, 김립 생일 카페에서 오픈 채팅방에 있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어요. 어쩌면 이게 마지막 생일 카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서로 성별을 얘기한 적이 없는데 공교롭게 전부 남자더라고요. 그날을 계기로 가까워진 40대인 형 두 명이 있는데요. 여러 번 따로 만나기도 하고, 만날 때마다 제가 지갑도 못 열게 하는 형들이에요. 셋이 만나면 멤버들 얘기밖에 안 해서 형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잘 모르지만요(웃음). 재작년에 소중한 친구가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형들이 너무 보고 싶더라고요. 그때 형들의 위로가 정말 큰 위안이 됐어요. 지금도 가끔 힘들 때 전화해서 징징대요(웃음). 저는 팬덤이라는 큰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낀다기보다 오빛으로 엮인 그 형들과의 관계에서 팬으로서의 유대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응원봉 걸스 아이돌을 좋아하는 남성 팬의 이야기를 접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남성 팬덤의 분위기라는 건 어떤가요?
니제 남성 팬은 있는데 ‘남성 팬덤’이라는 게 존재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이달의 소녀는 남성 팬이 꽤 많은데, 제 경험상 남성 팬들이 모여서 공유하는 특별한 무언가는 딱히 없는 것 같아요. 커뮤니티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 않아서 주로 생일 카페에서 팬들을 보는 편인데, 남성 팬들끼리만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요. 한때 팬덤 내에 남성 팬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있었어요. 오프라인 행사에서 여성 팬한테 집적거리는 남성 팬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분위기를 남성 팬들도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선을 긋고 싶은 마음에 남자들끼리 모이지 않으려고 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제가 트위터를 하면서 느낀 게, 트친소를 할 때 기본적으로 다들 여성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요. 바이오에 남성이라고 기재하면 친해지기 어려울 것 같아서 저는 성별도 쓰지 않고, 트친소도 참여하지 않았어요. 남성 팬의 경우는 성별을 드러내지 않으니까 남성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우나 팬덤 내에서 남성 팬들은 뭘 해도 욕을 먹는 위치인 것 같기도 해요.
니제 ‘남덕들 다 뒤졌으면 좋겠다’라는 트윗을 본 적도 있어요(웃음).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죠. 한편으로 여자 아이돌을 성희롱하는 사람을 보면 막연하게 남성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걸 팬이라고 할 수 있나 싶어요. 그럼 도대체 남성 팬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요? 저도 남성 팬인데 다른 남성 팬들이 뭐 하는지 전혀 몰라요. 여성 팬들이 만드는 담론에 참여하는 남성 팬은 있을 수 있지만, ‘남성 팬들의 담론’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남성 팬’이라고 범주화하는 게 적절한지 잘 모르겠어요. 말장난 같을 수 있지만, ‘팬덤 내의 남성’을 이야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것도 쉽지는 않죠. 온라인에서는 성별을 알기 어렵고, 안다고 해도 딱히 별말이 없으니까요. 남성 팬들은 어디에서 어떤 정동을 느낄까? 그로 인해 어떤 생각과 언행을 하게 될까? 그것이 그들이 ‘남성’임과 얼마나 관련이 있을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에요.
응원봉 걸스 이달의 소녀 팬덤 내에도 사이버 불링을 하거나 갈등하는 분위기가 있나요?
니제 최근에는 싸울 일이 없죠. 소속사 욕이랑 멤버들 걱정밖에 안 해요. 오히려 해외 오빛과 국내 오빛 사이에 소속사에 대한 지지 여부를 두고 약간의 갈등이 생긴 적은 있어요. 그런데 이건 다른 팬덤에서도 꽤 흔한 일이에요. 그런 걸 제외하면 갈등이라고 할 만한 건 없는 것 같아요.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이다 보니까 논쟁이나 싸움이 발생하기 힘들기도 하고요.
응원봉 걸스 불공정 계약을 의제화하기 위해 오픈채팅방을 개설했다고 했는데 진전된 부분이 있나요?
우나 소속사와의 분쟁에 주요하게 개입하는 규모 있는 트위터 계정이 있었어요. 문제의식을 가진 팬들이 따로 그 계정에 연락했는데, 아무도 응답을 못 받아서 제가 오픈 채팅방을 만들고 팬카페에 링크를 올린 거예요. 채팅방에서 트럭 시위나 버스 광고를 하자는 등의 다양한 의견이 나왔는데, 며칠 뒤에 그 계정에 트럭 시위를 하지 말라는 내용의 트윗이 올라왔더라고요. 그런 식의 제재로 인해서 적극적으로 뭘 하기가 어려웠어요. 오픈 채팅방에 있는 사람들도 그 계정에서 뭘 안 하니까 우리가 하는 거지, 무언가를 한다면 그쪽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팬덤 규모가 작아서 그런지 몇 개의 계정이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만약 오피니언 리더가 되는 계정이 없었더라면 뭐라도 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죠.
#팬(덤)과 정치
응원봉 걸스 트럭 시위를 하지 말라는 이유는 뭐였나요?
니제 괜히 시끄럽게 일 벌이지 말라는 거죠. 근데 의제화를 어떻게 조용히 하나요? 애초에 그 사람들은 불공정 계약을 노동 문제로 연결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당시에 가수 이승기 씨도 소속사와의 계약 분쟁으로 뉴스에 오르내릴 때라 이달의 소녀의 계약 분쟁과 함께 큰 사회적 이슈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노동 문제로 보지 않고 각각의 개별적인 계약 분쟁으로 보더라고요. 노동이라는 단어에 대한 강한 거부감과 정치적으로 엮이면 안 된다는 만성적인 불안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뭐라도 해보고 싶어서 언론사 기자나 담당 변호사에게 연락을 해보기도 했어요. 변호사가 그 사실을 멤버들에게 전했다면 팬들이 어떻게든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았을 테고, 그걸로 만족하자고 얘기하기도 했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응원봉 걸스 계엄 이후에도 정치를 거부하는 분위기인가요?
니제 혜주가 탄핵 관련해서 언급한 걸 보고 어떤 팬들이 자랑스럽다는 트윗을 올렸는데, 누가 그걸 알티하면서 ‘너는 시민이기 전에 아이돌인데 무슨 짓이냐’라고 올린 걸 봤어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는데(웃음).
우나 세상에 시민이기 전에 아이돌인 사람이 있어요?(웃음)
니제 그러니까요(웃음). 근데 그 트윗을 본 뒤에 엄청 감동적인 트윗을 본 거예요. 캡처도 해놨어요. “‘세상 모든 소녀들을 위하여’ 무대를 선보여 온 팀이 ‘정치적’이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팀의 세계를 사랑하고 응원해 온 팬덤이 ‘정치적’이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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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나 이달의 소녀 세계관이 이미 정치적이잖아요. 소수자와 마이너리티가 중심이 되는 세계관인데.
니제 이달의 소녀가 멤버를 한 명씩 공개하고 유닛을 만드는 방식을 반복했는데, 그게 이들의 서사이자 세계관이거든요. 여기저기 흩어져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온 소녀들이 만나 하나가 되는 거죠. 팬들도 이 서사에 포함되고, 결국 우리 모두가 이달의 소녀인 거고요. ‘Butterfly’ 뮤직비디오를 보면 다양한 생김새와 피부색을 가진 여성들이 다양한 국가에서 등장하는데, 이러한 장면들이 세계관의 핵심적인 콘셉트를 집약하고 있는 거죠. 지극히 ‘정치적’이지 않나요? 그런데 제가 느끼기에 일상에서 ‘정치적’이라고 하는 것과 팬덤에서 받아들이는 ‘정치’가 다른 것 같아요. 팬덤마다 다른 맥락이 있겠지만, 어떤 팬덤의 경우에는 정치라는 단어를 ‘정당 정치’의 차원에서 생각하기도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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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나 ‘아이돌에게 정치를 묻히지 말라’는 말이 제가 엔시티 퀴어로 활동하면서 숱하게 들었던 ‘엔시티에 퀴어 묻히지 말라’는 말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엔시티 멤버가 그렇게 많은데 당연히 퀴어가 있을 수 있고, 프로덕션 내에 퀴어 노동자가 존재할 수 있는 건데, ‘퀴어를 묻히지 말라’는 건 누군가를 배제하는 말이잖아요. 다행히 당시에 누군가 호모포빅한 발언을 하면, 엔시티 퀴어 팬들뿐만 아니라 퀴어 활동가들도 함께 대응을 해줬어요. 그때부터 퀴어 의제를 팬덤 의제로 만들지 말고, 퀴어 운동 단체들과 함께해서 퀴어 커뮤니티 의제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요.
한편으로 우리끼리 서로를 돌보는 게 너무 힘들기도 했거든요. 엔시티 퀴어를 함께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퀴어로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탈가정을 바라는 상태였고, 저도 아웃팅 문제로 원가족과 마찰이 있었어요. 돌봄의 한계를 느끼기도 해서 이 사람들과 퀴어 커뮤니티를 연결해 주고, 팬덤 내 퀴어 의제를 대외적인 문제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컸죠. 다행히 엔시티 퀴어 내에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박해받는 빠순이?
응원봉 걸스 윤석열 퇴진 성소수자 공동행동과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이 주관한 ‘평등으로 가는 수요일’ 집회 홍보물에 엔시티의 응원봉 이미지가 사용되었고, 일부 아이돌 팬덤의 반발로 홍보물이 삭제된 일이 있었어요. 해당 논의를 어떻게 봤는지 궁금합니다.
우나 엔시티 멤버들이 한마디도 안 했는데 엔시티 응원봉이 ‘평등으로 가는 수요일’에서 상징적으로 쓰였다는 건 너무 영광스러운 일 아니에요? 제가 아는 엔시티 팬분은 너무 기쁘면서 조마조마했대요. 다른 팬덤에서 ‘왜 엔시티 응원봉만 써주냐’고 할까 봐요(웃음). 모두의 조롱을 받던 돈가스 망치*가 어떻게 광장의 마스코트가 됐는데, 이제 그걸 지우라니요. 그러한 반응은 우리를 정치 주체로서의 시민이 아니라 다시 아이돌 팬으로 축소시키는 일이라고 한 트윗을 봤는데 정말 공감했어요.
응원봉이 정치적으로 쓰이는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응원봉을 들고 광장에 나온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 자체가 정치적인 행동인데, 이해가 잘 안돼요. 엔시티 응원봉을 들고나왔지만 퀴어가 아닌 여성으로서 나왔으니까 그런 걸까요? 그렇다면 왜 여성과 퀴어가 분리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수많은 퀴어들이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요. 특히 여성들이 교차적으로 형성되는 다양한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꺼린다는 느낌을 받아요. 스스로 퀴어라고 생각하지 않는 여성들이 마치 자신의 파이를 뺏길 것처럼 구는 양상이 심화된 것 같기도 하고요. 퀴어의 인권이 보장되면 여성 인권이 침해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정체성을 연결의 매개로 삼는 것이 아니라, 파이 나누기로 보는 건 자본주의 사회가 계속 주입하는 관점이기도 하죠. ‘누군가 너의 대표성을 가져가면 네 몫은 없다’는 건데, 정치 의제는 파이 뺏기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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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시티의 응원봉인 ‘믐뭔봄’은 특유의 커다란 생김새와 투박한 디자인으로 출시 당시 고기를 연하게 만드는 조리 도구인 ‘돈가스 망치’와 닮았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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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제 “여성들이 나온 건데 왜 계속 팬덤이라고 하냐”는 말도 봤거든요. 근데 여성들이 나온 게 아니라 응원봉을 든 여성들이 나온 거잖아요. ‘2030 여성’이라고 호명해서 마치 주류인 것처럼 감각하게 한 다음, 퀴어나 팬덤 등을 다 지우는 일종의 ‘주류화 전략’이 아닌가 싶어요. ‘2030 여성’을 누군가를 삭제하는 기표로 사용하는 게 다차원적으로 악질적이죠. 지금 광장에 이렇게 많은 응원봉이 등장한 건 퀴어 운동의 역사와 연결되는데, 맥락을 다 잘라내고 편협한 시각으로만 사안을 바라보는 것 같아요.
광장에 응원봉을 들고나온 팬들 중에 가시적으로 여성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언론에서 끊임없이 ‘2030 여성’이라고 호명하는 건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요.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2030 남성을 보수 혹은 극우로 호명하고, 2030 여성을 진보 혹은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로 호명함으로써 동등한 유권자로 창출된 것 같은 효과를 주고 있는 건가 싶거든요. 그래서 어떤 여성들이 ‘여성’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퀴어를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건 아닐까 싶고요. 이러한 움직임은 ‘여성’이라는 대표성을 탈취되기 쉬운 아주 취약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건데, 사실 ‘퀴어 팬덤’에 의해 ‘2030 여성’의 대표성이 탈취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거의 없단 말이에요. 한국에서 공개적으로 목소리 낼 수 있는 퀴어 팬덤은 정말 한 줌이잖아요(웃음). 본인의 취약성을 전제로 퀴어를 배제하고 공격하는 게 팬덤의 피해자 정체성과 맞닿아 있는 것 같기도 해요. 팬들의 ‘한’이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여성 팬덤을 취약한 존재로 만드는 맥락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응원봉 걸스 ‘박해받는 빠순이’라는 감각이 광장에서 부정적인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했죠. ‘퀴어가 아이돌 팬의 자리를 뺏는다’는 식으로요.
우나 그동안 ‘빠순이’라는 말이 여성 혐오적이라는 페미니즘 연구나 분석이 많이 나왔는데, 정치적으로 자세하게 들여다보는 작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피해자성만 강조된 것 같아요. ‘박해받는 빠순이’라는 감각이 이러한 분석 전에도 있었을까요? 팬들을 취약하게 만드는 건 ‘소비자 정체성’이잖아요. 산업이 여성 팬들을 리스너나 비판적인 관점을 지닌 존재로 대우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현실 감각이 부족한 존재로 낮잡아 보는 문제도 있고요. 팬들을 취약하게 만드는 주체, 우리가 공격해야 하는 대상은 산업이거든요. 그런데 자신의 피해자성을 앞세워 다른 팬을 공격하는 이들이 있단 말이죠. 오히려 산업과 한 편인 것 같은 팬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엔시티 퀴어에게 ‘퀴어 묻혀서 엔시티 욕먹게 하지 말라’는 말도 빠순이로서 정치 공동체를 지향하는 발언은 아니잖아요. 피해자성만 취득해서 다른 피해자를 공격한다면, 결국 우리는 계속 멸칭으로서의 ‘빠순이’로 남을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갈등은 어쩌면 팬덤 내에 신자유주의적이었던 문화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나오는 잡음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팬덤에게는 파이 뺏기가 더 가까운 정서잖아요. 한 아이돌이 잘되면 다른 아이돌의 팬이 줄어들고, 오로지 한 그룹만을 좋아해야 하고, 앨범 판매량이나 음악방송 순위로 계속해서 경쟁해야 하는 등 산업이 조장하는 신자유주의적인 방식에 너무나 익숙하니까요.
응원봉 걸스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요?
우나 ‘평등으로 가는 수요일’ 이슈도 응원봉 이미지를 삭제하는 걸로 마무리되었지만 긍정적인 부분도 있어요. 과거에는 엔시티 팬덤 내에 퀴어 팬이 있고, 우리가 어떻게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있는지 엔시티 퀴어 내부에서만 얘기했는데, 이번에는 다른 분들이 먼저 예전에 엔시티 퀴어라는 게 있었고, 퀴어 팬이 광장에 나온 게 처음이 아니라는 말을 해주시더라고요. 엔시티 퀴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싶어서 희망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어요.
또 아이돌 노동권에 대한 논의는 생각보다 빠르게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중인 것 같아요. 에스파 카리나 열애설이 났을 때, ‘아이돌도 노동자다’라는 요지의 글을 썼다가 엄청난 사이버 불링을 당한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얼마 안 가 하이브 사태가 터졌고, 하니가 국정감사에 참석했고, 사람들이 아이돌의 노동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더라고요. 이제는 아이돌을 노동자라고 얘기해도 저처럼 사이버 불링을 당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이돌 당사자가 노동권을 침해받았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퀴어 정치와 오늘의 광장
응원봉 걸스 케이팝과 응원봉은 퀴어문화축제에서 먼저 사용된 아이콘이죠. 일부 언론이나 연구자들은 퀴어 정치의 맥락을 소거한 채 응원봉 광장을 분석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나 퀴어문화축제를 빼고 오늘날의 광장을 말할 수 없어요. 퀴어문화축제에는 퀴어 운동 단체만 참여하는 게 아니라 여러 인권 단체가 부스를 내고, 함께 노동하는 경험을 해요. 그 단체들이 지금 광장에도 나와 있고요. 집회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건 활동가들인데, 그들이 어디서 일해봤겠어요? 퀴어문화축제에서 누적된 집회 문화와 노동의 경험이 지금의 광장에 녹아있는 거예요. 단순히 광장에 퀴어가 많아서가 아니라, 퀴어문화축제에서 쌓은 노하우가 공동의 자산이 되었기 때문에 퀴어 정치를 보자고 하는 거고요. 더불어 많은 활동가가 퀴어 당사자이고, 각 단체에 내부 문화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퀴어 활동가들이 정말 많아요. 퀴어 운동 단체들이 다른 단체와 연대하는 움직임도 예전부터 있었고요. 지금의 ‘말벌 동지’처럼 ‘부르지 않아도 연대하러 간다’는 감각을 자연스럽게 공유했었어요. 이러한 경험들만 떠올려봐도 한국의 사회운동은 퀴어 정치와 떼어놓고 말할 수 없죠.
니제 지금의 광장은 일상 정치, 문화 정치, 정체성 정치 등 다양한 맥락과 연결되는데, 구체적인 맥락을 삭제함으로써 정당 정치의 범주로 가두는 것 같기도 해요. 2030 남성은 국민의힘을 지지하고, 2030 여성은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한다는 미디어의 프레임이죠. 근데 제 주변 2030 여성 중에 더불어민주당 지지자 한 명도 없거든요(웃음). 언제까지 우리가 유권자 창출을 위한 프레임에 갇혀 있어야 하나 싶어요. 일부 기자나 연구자들이 그런 프레임을 재생산하는 게 문제죠.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청년’ 담론의 연장선이기도 한데요. ‘이대남’, ‘이대녀’라는 대립 구도의 구성을 거쳐 이번에는 ‘2030 남성’과 ‘2030 여성’이라는 대립 구도를 구성한 건데, 프레임 자체를 비판적으로 봐야 할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이번에 응원봉을 들고 모인 사람들을 ‘팬덤’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하나의 팬덤은 아니니까요. 부분적인 액티비즘이 모여서 하나의 거대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건데*, 내부의 차이를 삭제하는 게 문제죠. 그래서 미디어가 제공하는 굳건한 프레임을 강하게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팬덤 정치’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사용되는데, 그럼 ‘팬덤의 정치’는 무엇이 되어야 하고, 또 ‘팬들의 정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이미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시점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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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덤이라는 돌봄 공동체
응원봉 걸스 그렇다면 팬덤과 사회운동의 접촉면은 무엇일까요?
우나 팬덤이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명된 돌봄 공동체라고 생각해요. 팬덤 안에서 정말 복잡한 경험을 하거든요. 소비자로서의 경험도 하지만 동시에 서로를 적극적으로 돌보는 경험을 하기도 하죠. 가족이 아닌 사람과 돌봄을 주고받아 보는 일이 팬덤과 사회운동의 연결점인 것 같아요. 누군가를 같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무언가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온라인에서 처절하게 싸워보기도 하고, 엄청난 정동을 느끼기도 하고, 누군가를 조건 없이 돌보기도 하잖아요. 언론의 분석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역사가 팬덤 안에 있어요. 지금의 분석이라고 하는 것들은 팬덤 정체성이 얼마나 유동적인지 다루지 않고, 팬덤 안의 경험들이 어떻게 사회운동과 접촉되는지도 다루지 않아요.
현대사회에서 팬덤이 돌봄의 공간으로서 기능하는 건, 이 사회에서 돌봄을 경험할 수 있는 공동체가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지역사회는 망가졌고, 학교도 돌봄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죠. 접근성이 좋은 곳 중에 남은 것은 팬덤 혹은 종교뿐이에요. 저는 많은 사람들이 자본의 논리를 벗어나 내 선택을 증명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무 이유 없이 베풀고, 돌봄을 당하는 욕구가 충족되는 장소가 팬덤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계속해서 팬덤을 찾고, 남아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이 돌봄의 장으로 아이돌을 소환하고 싶기도 하고요. 돈 없이도 충분히 서로를 돌볼 수 있거든요.
팬덤을 제외하면 사회운동이 또 다른 비자본주의적인 장소일 텐데, 아무래도 덕질보다는 재미가 없고 진입 장벽이 높죠. 활동가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내가 어떤 단체에 연대를 하면, 내가 속한 단체의 역량을 빼앗기는 게 아니라 이 단체의 역량이 내 것이 되는 거예요. 1 더하기 1은 단순히 2가 아니라는, 숫자로 셀 수 없는 감각을 사회운동을 통해 배워가는 거죠.
니제 팬들이 사회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은 그렇게 깊이 있는 분석은 아닌 것 같아요. 응원봉을 든 사람들이 광장에 나와서 무엇을 했고, 앞으로 무엇을 하는지가 중요한데, 구체적인 장면을 다 지우고 인구통계학적인 측면에서 ‘2030 여성’, 그러한 방식으로 구성된 프레임에 대한 그들의 생각만 남겨 놓으니까 팬덤에서 어떤 가능성도 도출해 낼 수가 없는 거죠. 저는 팬덤의 구체성을 자세하게 다뤄야 응원봉이 광장으로 나오게 된 경로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해요. 광장에 ‘누가’ 나왔는지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무엇’을 주고받는지가 중요하다고 봐요. 콘서트장에 가면 생판 모르는 사람들끼리 이것저것 주고받잖아요. 하나 더 가져가라고 손에 막 쥐여주고요. 이렇게 조건 없이 선물을 주고받는 곳이 정말 없어요. 물론 이렇게 물건을 주고받는 방식은 우리가 정동 자본주의 산업 안에서 착취당하면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죠. 하지만 거기서 팬덤이 어떤 가능성을 발굴해 내는지 볼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사회 없는 국가’인 것 같은데요. ‘사회’라는 공간이 사라지는 와중에 몇 안 남은 파편적인 사회가 팬덤이지 않을까 싶어요. 어떤 산업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마는 거죠. 그렇게 해야만 벌 수 있는 돈이 있으니까요.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2030 남성을 분석하는 여러 기사들이 나오고 있는데, 2030 남성들이 관계 맺기에 서툴고, 정동을 나누는 경험이 부족해서 극우화된다는 분석이 많잖아요. 근데 저는 그들이 정치나 사회 문제를 이야기하는 방향이 다른 거지, 그들만의 공동체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온라인 커뮤니티만 봐도 오히려 과잉되어 있고요. 2030 남성들이 모일 곳이 없고 외로워서 극우화된다는 분석은 기존 젠더 규범의 문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재생산할 뿐이에요.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무엇을 나누는지 꼼꼼히 들여다봐야 한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하고 있어요.
우나 저는 모든 관계 맺기를 팬덤에서 배웠거든요. 이 사회는 경쟁하는 방법이나 커리어를 쌓는 방법 같은 것만 장려하고 가르치잖아요. 팬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본 건 엔시티 덕질이 처음이었는데, 그때 너무 놀랐어요. 같은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나한테 이렇게 잘해준다고? 내가 힘들면 같이 힘들어하고, 슬프면 같이 울어준다고? 그렇게 강력한 정동을 누군가와 처음 나눠본 거예요. 충격적으로 좋은 경험이었고, 그래서 갈등이 있었을 때 더 힘들기도 했고요. 사람을 깊이 신뢰해 보기도 하고, 반대로 불신해 보기도 하면서 인간적으로 성숙해지고 자립할 힘도 얻었어요.
또 스스로 일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도 팬덤에서 처음 배웠는데요. 팬덤 내에서 자발적 노동이 부정적인 쪽으로만 얘기되는데, 저는 단순히 착취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살면서 팬덤이 아니면 자발적으로 노동을 해볼 기회가 별로 없거든요. 성과로 귀결되는 협업 말고 생일 카페 운영이라든지, 깃발을 같이 만든다든지, 돈을 공동으로 모금하는 등의 경험을 처음 해본 거예요. 팬덤 내에서 노동하는 경험을 하지 않았더라면 전공과 무관한 예술 기획자로 일해야겠다는 생각도 못 했을 것 같아요. 기획하고, 일을 벌이고,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에게 메일을 보내고, 누군가에게 함께하자고 제안하고, 무언가를 조직하는 일을 다 팬덤에서 배웠어요. 물론 착취적인 부분도 있지만, 분명 우리가 얻는 것도 있어요. 그건 다 우리의 자산이죠.
니제 비슷한 맥락에서 ‘차가운 시장의 논리’ 역시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해요. 인류학적 자료들을 보면, 시장은 단순히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라, 서로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불안과 공포를 완화시키는 장소로 기능하기도 했거든요. 물건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관계가 만들어지는 거죠. 팬덤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가진 장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아이돌 산업처럼 정동 자본주의를 잘 보여주는 산업은, 단 한 번도 오직 ‘돈’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이었던 적이 없어요. 다양한 감정과 관계, 균열이 함께 존재하고 팬덤은 그 균열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공간이에요. 이러한 관점에서 봐야 팬덤을 마냥 낭만화하지도 않고, ‘자발적 착취’라고만 단정 짓지도 않으면서 보다 정당하고 균형 잡힌 분석이 가능해질 것 같아요.
우나 맞아요. 돌봄을 계산하고 수익화하는 순간 그 의미가 퇴색된다고 생각해요. 사회운동도 후원자 모집이 우선시되어서는 안 되고, 우리가 비자본적으로 어떻게 연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게 먼저라고 생각하거든요. 후원자 없이도 생존할 방법을 늘 찾아야 해요. 어쩌면 팬덤은 소비자로서 연대가 필요하다고 헷갈릴 수도 있죠. 하지만 소비자만 팬은 아니잖아요. 좋아하면 다 팬이고, 누가 돈을 더 많이 썼다고 해서 ‘진짜 팬’인 건 아니니까요. ‘팬덤 경제’가 팬덤이라는 단어를 오용한 대표적인 경우죠. 팬이면 무조건 구매할 거라고 전제하는 거잖아요. 팬덤은 아티스트가 무슨 말을 하든 다 믿고, 소속사가 뭘 하든 무조건 구매하는 존재가 되면 안 돼요. ‘팬덤 경제’와 ‘팬덤’을 같은 개념으로 봐서는 안 되고요. 팬덤이 정치적이려면 자본주의 논리를 넘어서야 해요. 단절되고 삭막한 사회에서 팬덤은 새로운 연대의 매개가 될 수 있어요.
니제 ‘팬덤 경제’나 ‘팬덤 비즈니스’라는 말로 마치 돈을 얼마나 많이 쓰고, 얼마나 더 많은 활동에 참여하는지로 팬심을 판별하곤 하잖아요. 물론 우리는 충성스러운 소비자이기도 하죠. 소속사가 저런 짓을 하는 데도 돈을 쓰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팬을 ‘소비자’라는 단어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어요. 아티스트나 작품을 향한 사랑만이 아니라, 그걸 사랑하느라 모여 있었던 우리가 어쩌다 만들어 버린 사랑이 있다는 거죠.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나온 여자들’ 인터뷰이들도 그렇고, 제가 책을 쓰면서 만난 사람들도 그렇고, 지금 여기 모여 있는 우리도 그렇고, 내가 이렇게 지구를 파괴하면서 앨범을 사도 되는지, 내가 이렇게 최애를 대상화하면서 사랑해도 되는지, 나노 단위로 캡처하고 사진을 확대해도 되는지, 이런 식으로 덕질을 해도 되는지 온갖 갈등을 겪잖아요. 내가 이걸 해도 괜찮을까 고민할 때, 덕질이 만들어내는 정동이 있어요. 무언가가 쉽게 침투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거죠. 취약하지만, 그렇기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거고요. 그 과정에서 팬덤으로서 아티스트와 다른 동료 팬들을 사랑하는 경험을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팬과 팬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발명해야 할 시점인 것 같아요. 그래야만 광장의 표상으로 자리 잡은 응원봉이 광장에 나올 수 있었던 과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팬덤의 또 다른 역량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요.
#혁명의 케이팝
응원봉 걸스 긴 시간 동안 이야기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끝으로 두 분이 소개하고 싶은 ‘혁명의 케이팝’이 있다면요?
니제 이달의 소녀 ‘PTT (Paint The Town)’을 소개하고 싶어요. 가사와 뮤직비디오, 음악이 주는 분위기가 엄청나게 호전적인 곡이에요. 제목에서도 ‘이 동네는 우리 거다’, ‘이 동네를 탈환할 것이다’ 이런 포부가 느껴지고요. 도둑맞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되찾자는 의미로 이 노래를 골랐어요. 국민의힘 해체하고 이달의 소녀 재결합하기를 바랍니다(웃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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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NA ‘PTT (Paint The Town)’ M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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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나 저는 아르테미스의 ‘Virtual Angel’을 추천하고 싶은데요. 이달의 소녀 멤버들이 이번 탄핵 광장에서 가장 정치적인 아이돌이었다고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괴리감을 덜 느낀 아이돌이기도 해서 그들이 참여한 작업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저는 아이돌이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걸 확인하는 게 정말 중요해졌거든요.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무언가를 숭배하는 서사로 읽힐 수도 있지만, 아이돌과 동일시하는 팬의 관점일 수도 있고, 팬과 아이돌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관점으로 해석할 수도 있어요. 최근 본 케이팝 서사 중에서 제일 혁명적이었던 것 같아요. 어쩌면 지금 우리는 버추얼한 세계에서 혁명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르죠. 현실 세계에서는 알려주지 않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도 이 곡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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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에 응해주신 우나, 니제 님 감사합니다.
*대담 내용은 <편협한 이달의 케이팝>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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