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본격적인 케이팝 사랑은 2006년 SM타운 여름 앨범과 함께 시작됐다. 투명한 플라스틱 껍데기에 지문 자국이 잔뜩 남을 정도로 만지작대던 때를 가끔씩 떠올린다. 아무런 걱정 없이 순정으로 케이팝 하던 시절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케이팝에 대해서 떠드는 뉴스레터를 보내고, 지금도 레드벨벳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언젠가부터 ‘탈케’는 내 인생의 중요한 과업이 되었다. 그런데 왜? 도대체 케이팝이 뭐라고 ‘탈’까지 해야 하는지? 답을 찾을 수 없는 수많은 질문 끝에 결국 이런 고리탑탑한 물음에 도달한다. ‘당신에게 케이팝이란..?’
열다섯 살 보아가 본인이 데뷔했던 소속사의 이사가 되고, 점핑보아가 자라서 샤이니가 되고, 시즈니가 NCT로 데뷔하는 동안, 어느 초등학교에서 ‘동해 마눌’로 활동했던 나의 시간도 착실히 흘렀다. ‘슴덕 새싹’이었던 아이는 격변과 혼돈의 시기를 지나 페미니스트도 되고 노동자도 되고 아무튼 기타 등등이 되었다. 이것저것을 짊어진 낡고 지친 현대인은 2006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발견하기 시작하며 케이팝 산업에 짙게 드리운 검은 그림자를 마주하게 된다. 케이팝 산업과 현대인, 도파민과 스트레스의 만남. 안 그래도 사는 게 팍팍한 나는 페미니스트-노동자-팬-기타 등등 중에서 세상과 나에게 가장 해로운 것처럼 느껴지는 어떤 역할을 내던지고 싶었다. 포스트잇처럼 쉽게 붙였다 뗐다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작년에 어느 걸그룹 멤버가 암워머에 기다란 바늘이 꽂힌 채로 무대에 올라 이슈가 됐던 적이 있다. 다행히 무대를 시작하기 전에 발견했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춤을 추는 과정에서 본인이나 멤버를 다치게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일부 팬들은 의상 담당자의 부주의를 지적하며 스태프 교체를 요구하기도 했다. 슬프게도 의상 때문에 아이돌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고, 아무리 얘기해봤자 소속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기 때문에 팬들이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팬들의 근심에 공감하면서도 자꾸만 어떤 사람들이 떠올라 오로지 팬의 입장에서 아이돌만을 걱정하기가 어려웠다. 저 큰 바늘을 보지 못할 정도로 정신없이 일하는 무대 뒤편의 사람들, 출퇴근 개념 없이 고된 일정을 소화해 내는 피로한 사람들. 그들은 나였고, 내 친구들이었다. 그래서 뮤직비디오 공개 일정이 늦어진다는 공지에도 누군가의 ‘일 처리 수준’을 운운하기가 어렵다. 빠듯한 제작 일정 속에서 밤낮으로 수정에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상상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크레딧에 오르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런 것들을 계속 생각하게 된다. 이름 붙일 수 없는 노동, 지워진 이름들, 암묵적인 착취 같은 것들. 그런데 이 몸은 또 멋진 페미니스트여서 추운 날에 춥게 입고, 뜬금없이 애교를 요구받고, 성적 대상화로부터 안전하지 않고, 자신들의 의견이 반영되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뮤직비디오가 공개되기를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걸그룹의 척박한 노동 환경을 외면할 수도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완전 언럭키일석이잖아...
내가 모순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에도 싹수없기로 진짜 유명한 케이팝 산업은 쉬지도 않고 적폐와 함께 몸집을 키워나간다. 랜덤 포카와 팬 사인회 응모권 등의 상술을 앞세워 중복 구매를 조장해 팬들이 지구를 죽이는 데 가담하게 만들고, 루키즘이 만연한 사회에서 ‘마른 몸’을 강조하며 많은 이들이 자기 신체를 부정하거나 혐오하게 만들고, 팬들의 인권은 안중에도 없는 산업답게 팬들의 노동력을 무보수로 착취하려는 소속사의 서포터즈 모집 공고가 올라온다. 이쯤 되면 누가 케이팝 좋아하라고 칼 들고 협박했냐고 묻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어떻게 적폐까지 사랑하겠어, 케이팝을 사랑하는 거지. 그러니 그냥 울면서 케이팝 하는 거다. ‘이게 맞냐?’와 ‘아니 근데’를 반복하면서. ‘케이팝을 불매한다고 해서 이 산업의 많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산업이 ‘좋은 사회’ 안에서 ‘좋은 산업’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페미니스트-노동자-팬-기타 등등으로서 뭐라도 하는 수밖에 없다. 케이팝 산업이 플라스틱 앨범 껍데기로 쌓아올린 거대한 적폐의 벽을 와르르 무너뜨리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그날을 아주 구체적으로 상상해본다. 성 소수자 자긍심의 달을 맞아 앨라이 선언을 한 유재석이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커밍아웃을 한 아이돌 커플을 인터뷰한다든지, 어느 아이돌이 버블로 ‘내일부터 파업이라 버블에 오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보낸다든지, 그 소식에 팬들은 열화와 같은 응원의 답장을 보내고 내 아이돌의 파업을 응원하는 해시태그가 만들어진다든지, 유명 아이돌 그룹이 케이팝 산업의 루키즘과 꾸밈노동에 반대하는 취지로 ‘헤메코’ 없이 음악방송에 출연한다든지, 음악방송의 순위 제도가 사라져 팬들이 ‘스밍 노동’으로부터 해방된다든지, 정부가 환경 오염 기업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막대한 벌금을 부과해 모든 소속사가 ‘진짜’ 친환경 앨범을 만든다든지, 제로웨이스트를 추구하는 촬영 현장이 많아진다든지,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의 이름이 크레딧에 오른다든지 말이다.
이 산업의 변화에 힘을 실을 준비를 차근차근 하고 싶다. 이 산업 구조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도록, 케이팝 하는 즐거움을 잊고 괴로움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열렬히 좋아하고 또 비판하면서 이 산업 안에서 ‘팬으로서’ 존재하고 싶다. 그러니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의 사랑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