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편협한 이달의 케이팝>을 발행하는 일석입니다. 여름의 초입에서 이번 달도 열심히 케이팝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수만이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상표를 냈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에 이수만보다 케이팝에 진심인 사람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케이팝 소식이 있었지만 저에게는 오로지 ‘에스파의 달’처럼 느껴졌던 5월이었네요. 까딱하면 ‘편협한 이달의 에스파’가 될 뻔했답니다. 에스파에 관해서는 언젠가 4절까지 떠들 수 있는 기회가 있길 바라며, 그럼 ‘편협한 이달의 케이팝’ 5월호를 시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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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케이팝
→ 에스파의 ‘Armagedd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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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하지 않는 에스파의 기개를 보시라.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여성들은 언제나 나의 심장을 뛰게 한다. (심장은 원래 뛰지만, 아무튼 그렇다.) 힛맨뱅의 카톡이 만천하에 공개된 이후 은은하게 언짢은 상태였는데, 내가 방구석에서 어느 방향으로 살을 날리는 동안 에스파는 ‘최후의 격전지’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구나. 에스파와 올드 스쿨 힙합이라니 도저히 감이 안 왔는데(그래서 불안했던 것도 사실이다), 묵직하고 딥한 사운드에 ‘쇠맛’의 근본이 되는 에스파의 짱짱한 보컬까지 다 살린 미친 노래가 탄생한 것이다. 에스파 보컬 절대 살려. 게다가 이 생경하고 불친절한 뮤직비디오는 무엇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스럽고 신비로운 비주얼의 향연, 궁금증을 자아내는 기괴한 존재들의 등장, 불명확한 시공간이 주는 모호함과 긴장감, 신성하면서도 어딘가 불경한 이중적인 분위기가 시작부터 끝까지 몰입감을 조성한다. (참고로 나는 불경한 것을 매우 좋아한다. not 불교의 교리) 그동안 강단 있게 선보인 서사와 음악을 통해 고유한 영역을 구축한 에스파는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명확히 알고 있다. 정규 1집 발매 기념 쇼케이스에서 카리나는 “저희 곡을 이지 리스닝, 하드 리스닝으로 구분하기보다 그냥 ‘에스파 음악’이라고 얘기하고 싶다”고 했는데, 구구절절 옳으신 말씀이다. 나는 앞으로 에스파의 모든 음악을 ‘에스파 리스닝’이라 부르겠다. 누가 누구를 밟네 마네 할 동안, 에스파는 녹슬지 않는 날카로운 쇠창살을 쥐고 뚜벅뚜벅 미래로 나아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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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과몰입
→ 에스파 정규 1집 [Armagedd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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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 하면서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세요. 2020년 11월에 데뷔한 그룹의 정규 1집이 2024년 5월에 나온다는 게 말이 되는지? 어떻게 데뷔 3년 반 만에 첫 정규 앨범을 주냐며 어떤 소속사의 멱살을 쥐고 짤짤 흔들 때, 나의 고막 조물주가 만든 또 하나의 미친 노래 ‘Supernova’가 선공개되었고, 내 마음은 속도 없이 사르르 녹아버리고 말았다. 나도 SM만큼 에스파의 첫 정규 앨범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 에스파의 정체성과 세계관 형성에 크게 관여했던 이수만과 유영진이 없는 에스파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이 8할이었다. ‘쇠맛 하이틴’을 선보였던 ‘Spicy’도, 에스파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와 영화적 요소가 돋보였던 ‘Drama’도 좋았지만, 애증 그 자체였던 ‘광야’의 부재가 은근히 아쉬웠던 것도 사실이다. (에스파가 광야를 벗어나기를 그렇게 바랐는데,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다.) 하지만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에스파는 ‘Supernova’를 통해 이전의 세계관을 가뿐히 벗어나며 ‘다중우주’라는 새로운 세계관의 문을 연다. 광야를 박차고 나온 에스파는 이제 어디든 갈 수 있게 되었다. 한 손으로 번쩍 차를 들어 올리고, 시간을 조종하고, 상공을 비행하고, 손끝으로 불을 지르는 외계 존재들이 또 다른 차원에서는 ‘민초 몬스터’와 맞서는 용사도 될 수 있고, 나와 같은 세계에서는 대관령에서 친구들과 뛰어놀며 캠코더로 서로의 모습을 담는 보통의 인생을 살 수도 있게 된 것이다(수록곡 ‘Live My Life’ 트랙비디오를 대관령에서 촬영했다고). 그들에게 콘셉트와 세계관은 그저 음악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며, 결국 에스파가 보여주는 모든 것이 에스파의 세계관이 된다. SM이 스스로 ‘SM이라는 자부심’으로 굴러갈 때 이런 결과물이 나오는구나 싶다. 선생님들, 지금까지 너무 좋은데요. 정규 2집 4년 뒤에 줄 거 아니지요? 대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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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라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5월이었다. 지난 19일, BBC News에서 ‘버닝썬 사태’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버닝썬: K팝 스타들의 비밀 대화방을 폭로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공개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한 시간가량의 영상은 각종 협박과 위협에도 ‘버닝썬 게이트’의 핵심 인물들을 추적하고, 고발한 여성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 거기엔 구하라의 목소리도 있었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의 결정적인 도움으로 경찰과의 유착 관계를 밝혀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이 사실을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얼마나 다행이던지. 영상 중간에는 구하라의 활동 당시 모습이 잠깐씩 등장했다. 그리운 얼굴을 보면서 수많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2007년에 데뷔해 한국 걸그룹 최초로 도쿄돔에서 단독 공연을 개최하고, 데뷔 15주년을 맞아 다시 뭉쳤던 2022년까지.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정식 활동 곡도 아니었던, 어느 리듬 게임의 주제곡인 이 노래의 가사가 이전과는 다르게 와닿는다. ‘예쁘고 어린 소녀들’의 뻔한 사랑 노래가 아니라 카라 멤버 서로가 서로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어쩌면 그것도 사랑이지. 당신의 용기를 오래오래 기억할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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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동명이곡
→ 쥬얼리와 동방신기의 ‘Tonight’
발라드 안 듣는 사람의 발라드 추천. 전주만으로 나를 과거로 데려다 놓는 두 곡을 소개한다. (플레이리스트에 ‘Tonight’을 검색하니 아래 두 곡 말고도 잊고 있던 좋은 노래가 정말 많았다. 터보, 신화, 핑클, 지오디, 트랜스픽션, 렉시, 리사, 샤이니, 스피카…. 오늘을 살자고 다짐했는데 또 다 옛날 노래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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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2002년에 나온 노래를 좋아하는가? 나에겐 그 시절이 ‘문화 혁명기’쯤 됐던 걸까? 쥬얼리의 대표곡 중에는 ‘이티춤’ 열풍을 일으켰던 ‘One More Time’이나 ‘털기춤의 신’으로 등극했던 ‘Super Star’ 같은 댄스곡이 많지만, 개인적으로 초창기 앨범에 수록된 ‘이젠’이나 ‘Tonight’ 같은 쥬얼리표 ‘감성 발라드’를 좋아한다. (그 시절 발라드에는 ‘감성’을 붙여도 왠지 부대끼지 않는다.) 2000년대 발라드는 요즘 발매되는 발라드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아련한 무언가가 있다. 정통 발라드도 아닌, 아이돌 그룹 앨범의 마지막 트랙을 차지하는 발라드 무드의 팬송도 아닌 그 무언가 말이다. 기후 변화로 ‘선선한 여름밤’ 같은 건 이제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환상이 되어버렸지만, 그 시절 발라드에서는 미세 먼지 없던 시절의 새벽 공기가 느껴지는 기분이다. 같은 해에 발매된 핑클의 ‘영원’도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곡인데, 쥬얼리의 곡을 만든 유정연이 작곡했고, 이효리가 가사를 썼다. 고요한 밤에 이 노래들을 듣고 있으면 어스름한 새벽, 바람이 부는 해안가를 휘적휘적 걷는 어느 영화 장면 속의 주인공이 된다. 현실은 끝없이 오르는 전기세를 걱정하며 무더위에 뒤척이는 밤이겠지만, 여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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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호에 FT아일랜드의 곡을 추천할 때도 그랬지만, 무대 의상이 아닌 정장을 입고 경찰서에 출두하는 모습이 박제된 인간들의 노래를 추천하기란 꽤 망설여지는 일이다.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왠지 죄책감이 든다. 케이팝 팬의 비애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잘못은 그들의 몫이고, 내 추억은 죄가 없다. 하드 리스닝에 절여진 내게도 나름 좋아하는 발라드 계보가 있다. 나는 이걸 SMBSM Ballad라 부르는데, 동방신기의 ‘Tonight’, ‘One’, S.M. The Ballad ‘제규종지’의 ‘Hot Times (시험하지 말기)’, 천상지희의 ‘Renew’, 신화의 ‘중독’ 등 R&B가 가미된 ‘보컬 차력쇼’를 선보이는 곡이다. (켄지가 만든 ‘One’을 제외하면 모두 유영진의 곡이다.) 동방신기의 ‘Tonight’은 유영진의 동생 유한진이 작곡했고, 가사는 유영진이 맡았다. 박유천의 영어 내레이션까지 따라 할 수 있는 이 노래를 들으면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MAMA’가 아닌 ‘MKMF’를 하던 그 시절로 돌아간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이 무렵에는 ‘Tonight’을, 볼이 꽁꽁 얼 만큼 추운 겨울에는 ‘Love In the Ice’를 듣는 게 내 세상의 룰이다. 벗어날 수 없는 시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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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김윤아가 물었다. ‘유명도를 고려하지 않고 당신이 생각하는 자우림 음악의 정수 다섯 곡’은 무엇이냐고. 정규 앨범만 열 장이 넘는데, 다섯 곡만 꼽으라니. 그래도 고심 끝에 고른 다섯 곡에는 꼭 이 노래가 들어갈 것이다. 자우림의 정규 1집에 수록된 ‘욕’이다. (나는 첫 앨범에 과하게 의미 부여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 앨범은 정말 명반이다.) 사랑과 이별에 관한 노래가 판치는 세상에 누군가를 탓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노래라니. 더군다나 정말로 저주를 거는 듯한 좀 더 스산한 버전까지 있다. ‘너 땜에 난 꼬이는 거야 너 땜에 다 버린 거야’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이 노래가 나는 정말로 좋다. 자우림 음악은 이런 식이다. 우울할 때 같이 절망하고, 화가날 때 옆에서 더 크게 소리치고, 혼자라고 생각할 때 불현듯 나타나 손을 콱 잡아주고, 모든 게 망했다고 느꼈을 때 캄캄한 어둠 깊숙이 나를 꼭꼭 숨겨준다. 딩고 뮤직 ‘킬링 보이스’ 김윤아 편에는 이런 댓글이 달렸다. “김윤아가 살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영화 한 편이나 책 한 권이 한 사람의 인생을 뒤바꾼다는 이야기에는 심드렁한 편이지만, 이 댓글에는 왠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대단한 구원은 아니더라도 사방에 깔린 슬픔과 절망, 분노로부터 김윤아의 목소리가 종종 비상구가 되어주기도 했으니까. 이 비정한 세상에 자우림의 음악이, 김윤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는 것만으로 조금 위안이 된다. 세상 모든 인간이 비루하고 추접하게 느껴질 때 노래방에서 얼굴이 벌게지도록 힘주어 이 노래를 불러보기를. 점수가 낮게 나올수록 성공이다. ‘입 다물고 그냥 듣기나 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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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협한 이달의 케이팝⚡️
매월 15일에는 <케이팝은 핑계고>를
마지막 날에는 <편협한 이달의 케이팝>을 보냅니다.
(돌아와! 돌아와! 돌아와! 다시 돌아와!)
📮 nameisonest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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